Monday, February 28, 2011

제노믹임프린팅 - 특이한 유전현상

누구도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네소스의 피가 묻은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전신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네소스의 피에 담긴 히드라의 독기(毒氣)가 몸으로 스며든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오래 전 히드라를 죽이고 그 피로 만든 독화살로 네소스를 죽였다. 이제 그 앙갚음이 시작된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서둘러 옷을 벗으려 했지만, 옷은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이렇게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죽음을 각오한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몸을 태울 장작더미를 쌓아 올리고 그 꼭대기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이 누운 자리에 횃불을 던져 스스로를 불태웠다. 불꽃은 삽시간에 헤라클레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승의 불꽃은 헤라클레스가 인간인 어머니로부터 받은 부분은 모조리 태워버렸으나, 아버지 제우스로부터 받은 부분은 전혀 상처입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고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신의 반열에 오른 헤라클레스를 아버지 제우스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태워 하늘에 오르게 하였고, 별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였다. 헤라클레스를 미워하던 헤라마저도 그를 인정하고 자신의 딸 헤바(헤베)를 그와 짝지워주었다.


헤라클레스의 조각상

아이는 부모를 닮아서 태어납니다. 이는 생명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현상이니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채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알아내기 힘든 부분도 많습니다. 아이가 부모 중 누군가를 더 많이 닮을 것인지, 부모의 어떤 성질을 물려받을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옛사람들은 유전의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신과 인간 여성 사이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는 피와 살로 만들어진 육체를, 아버지로부터는 신성(神性)이 부여된 영혼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지상의 것이기에 이승의 불꽃으로 태워버릴 수 있었지만, 영혼은 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에 영원 불멸 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말이죠.

이 신화를 살펴보면, 옛 사람들이 유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들 역시 아이에게는 부모의 형질이 반반씩 섞여서 대물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이 것이 가능한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누구나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닮는지를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유전의 원리에 대해 짐작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유전을 ‘체액’을 이용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즉,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은 몸 속에서 각각의 특징을 지닌 체액을 만들어내는데, 아이가 생겨날 때 각각의 체액이 얼마나 포함되느냐에 따라 아이에게 유전되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버지의 혈액이 더 많이 섞이면 아버지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고, 반대로 어머니의 체약이 우세하면 어머니를 더 많이 닮는 아이가 태어나는 식으로 말이에요.

이 설명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모두 갈색 눈동자를 지닌 부모 사이에서 파란 눈동자를 지닌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이 아이의 조부모 중에는 파란 눈동자를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파란 눈동자라는 유전 형질이 한 세대에는 마치 사라진 듯 보였다가 다음 세대에 다시 나타난 것이죠. 이런 경우를 체액유전설로는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체액이 섞이게 된다면 한 번 희석되어 사라진 특성은 다시 나타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실제 유전에서는 한 세대에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형질들이 다음 세대에서는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자주 발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전을 담당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더라도, 이 물질이 입자, 즉 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예를 들자면, 물과 포도주스를 섞은 뒤에는 이 둘을 다시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래와 쇳가루를 섞은 경우에는 아무리 골고루 섞어놓았다고 해도 이들을 모래와 철가루로 다시 분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처럼 유전형질이 세대를 걸러서 나타난다면 유전을 담당하는 물질은 언제든 분리가 가능한 입자의 형태여야 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유전학의 아버지’라는 꼬리표를 떠올립니다. 멘델이 이렇듯 유전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은 바로 유전물질이 액체가 아니라 ‘입자’일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유전물질이 입자라는 가설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멘델의 연구는 ‘관찰→가설 설정→실험→법칙 수립’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근거를 통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유전학적 법칙을 완결했다는 의미도 가진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멘델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나오는 것은 ‘완두콩과 유전의 3법칙(우열/분리/독립의 법칙)’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을 테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유전물질이 입자일 경우에 특정 형질의 유전이 어떻게 세대를 건너서 나타나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춰 살펴봅시다.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

순종의 노란 완두와 초록 완두를 교배해 잡종을 만들면, 처음 만들어진 1세대 잡종 완두는 모두 노란색입니다. 그리고 이 노란 완두끼리 다시 교배를 해서 만들어진 2세대 잡종 완두는 노란 완두와 초록 완두가 3 :1의 비율로 나타납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색종이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볼께요. 여기 노란색과 초록색, 두 가지 색종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랑과 초록 색종이를 한 장씩 가지고 이를 겹쳐서 한 장만 보이게 해 봅시다. 단, 이 때 반드시 노란색은 초록색 종이 위에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모두 노란색과 초록색 색종이를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노란 색종이 뿐입니다. 이제 다시 각자 색종이를 서로 서로 한 장씩 교환해서 다시 겹쳐 봅시다. 이 때는 노랑이나 초록만 2장 가질 수도 있고, 노랑과 초록을 각각 1장씩 가질 수도 있지요. 이렇게 가진 색종이를 다시 겹쳐보면, 노랑이 반드시 초록보다 위에 와야 하기 때문에, 노란 색종이를 2장 가진 사람도, 노랑과 초록을 1장씩 가진 사람도 모두 겉보기에는 노란 색종이만 보일 겁니다. 다만 초록색을 2장 가진 사람들만 초록색 종이가 위에 보이도록 놓을 수가 있을테지요.


2장을 겹쳤을 때, 아래쪽은 보이지 않는 색종이처럼 멘델은 생명체의 성질도 겉으로 보기에는 한 가지 성질이지만, 실제로는 2가지 요인이 한 쌍으로 존재하여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생명체가 엄마, 아빠 양쪽에게서 각각 하나씩의 유전 인자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모 양쪽에게서 물려받은 DNA 중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유전자들을 대립유전자(allele)라고 부릅니다. 멘델은 대립 유전자가 어떤 물질인지 알지 못했지만, 생물체의 몸에는 그 생물체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유전물질이 존재하고, 이 물질은 부모로부터 각각 하나씩 물려받기 때문에 항상 쌍으로 존재하며, 후손에게 물려줄 때에는 쌍으로 존재하던 유전 물질 중 하나만을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을 가정했었지요. 그의 이런 가정이 옳았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지게 됩니다.

 이렇게 대립 유전자는 쌍으로 존재하는 유전 물질에 각각 존재하기 때문에 둘이 대립하게 되는데, 이들 사이에는 우열 관계가 존재해서 우성인 형질이 눈에 나타나지요. 어떤 경우, 한쪽이 다른 쪽보다 힘이 세서, 둘이 만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누르고 혼자만 나타나려고 합니다. 마치 두 장의 색종이를 겹쳤을 때 위쪽 색종이의 색깔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완두에서는 완두의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 중에서는 노란색 유전자가 초록색 유전자보다 힘이 센데, 이 때 힘이 센 유전자를 ‘우성’, 힘이 약한 유전자를 ‘열성’이라고 부릅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사람의 눈의 경우, 갈색눈의 유전자가 파란눈의 유전자보다 우성이므로, 갈색눈을 가진 사람이라도 파란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때때로 이들 사이에서도 파란눈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이처럼 두 가지 성질을 가진 생명체를 교배했을 때 첫 번째 자식들에게서는 두 성질 중 더 힘이 센 유전자의 특징만 나타나게 되고, 잡종 2세대에서는 다시 이 유전 형질들이 분리되어 이전 세대에서는 사라졌던 특징들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전자를 ‘우열의 법칙(Law of Dominance)’, 후자를 ‘분리의 법칙(Law of Segregation)’이라고 합니다.


인간 역시 유전법칙의 영향 아래 있으므로, 부모의 염색체를 절반씩 물려받습니다. 하지만 염색체 상에서 대립하는 유전자들 사이에는 우열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도 절반씩 닮지는 않습니다. 아빠가 가진 대립유전자가 엄마의 것에 비해 우성이라면 아빠만 닮을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라면 겉으로 보기에는 엄마만 닮은 것 같은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이 애초에 엄마의 것인지, 아빠의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유전자가 상대에 비해 더 우성인지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는 있는 법, 수는 적지만 때로는 특정 유전자들은 반드시 엄마에게서 받아야만 기능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유전자들은 반드시 아빠에게서 받아야 기능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즉, F와 F'이라는 대립유전자 쌍에서 본래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은 F인데, 이 F의 경우 아빠로부터 받았을 경우에만 기능하고, 엄마에게서 받는 경우는 기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제노믹 임프린팅(Genomic Imprinting,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유전적 인식 복사(遺傳的 認識 複寫)’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똑같이 생긴 상염색체상의 유전자를 부계와 모계로 나누어 인식해서 특정 유전자를 발현하거나 억제하는 유전 방식을 일컫는 것이죠.


17세기의 초상화, 과학자들은 이 아이가 프레더-윌리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제노믹 임프린팅은 유전병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유전병 중에 프래더-윌리 증후군(Prader-Willi Syndrome)과 엔젤맨 증후군(Angelman Syndrome)이라는 희귀한 질환이 있습니다. 프래더-윌리 증후군은 성격장애와 지능장애, 학습장애, 먹을 것에 집착하는 성향 등을 보이는 유전병의 일종이며, 엔젤맨 증후군은 낮은 지능과 ‘천사’라는 별칭에 걸맞게 천사처럼 늘 웃는 듯한 표정이 특징인 유전 질환입니다.

이 두 질환은 서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에 이름도 다르게 붙여져서 보고되었고, 각각 다른 질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분자생물학적인 기법이 발전되면서 이 병을 일으키는 유전적 원인을 찾게 되었는데 이 둘의 유전적 원인이 같게 나타납니다. 두 질환 모두 15번 염색체의 일부에 결실 혹은 돌연변이가 생겨 나타나는 질환인데, 같은 부위에 이상이 생겼어도 어떤 경우는 프래더-윌리 증후군이 나타나고, 어떤 경우에는 엔젤맨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이죠.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결국 학자들이 연구 끝에 찾아낸 답은 이 것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15번 염색체에 이상이 있을 경우 프래더-윌리 증후군이 나타나고, 반대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15번 염색체에 이상이 있을 경우 앤젤맨 증후군이 나타난 것이죠. 이런 방식의 유전을 제노믹 임프린팅이라고 하는데, 새끼를 돌보는데 관여하는 모성애 유전자, 특정 성별의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나게 하는 유전자(즉, 딸부잣집 혹은 아들부잣집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등이 이런 종류의 유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져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지요.


제노믹 임프린팅으로 나타나는 유전형질에서는 유전자가 어느 쪽에서 받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화에서도 이런 특징들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리스 신화를 살펴보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는 반인반신들이 몇 명 등장하는데, 헤라클레스처럼 아버지가 신일 경우 대개 영원영생을 보장받는 반면, 아킬레우스처럼 어머니가 신일 경우, 어머니 테티스가 갓 태어난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물에 담그는 수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물론 헤라클레스도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에게 있어 죽음은 이승의 껍질을 벗고 신들의 반열에 오르는 통과 의례로 아킬레우스의 죽음과는 그 의미가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혹시나 옛 사람들도 어렴풋이 특정 유전형질은 부모에 따라서 다르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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