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말미잘 - 바다의 아네모네

말미잘

아네모네란 꽃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잠깐 피었다가 스쳐가는 바람결에 지고 마는 화려하지만 너무도 연약한 꽃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는 자신의 아들 에로스(로마신화의 큐피터)의 화살을 맞고 아도니스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신과 인간의 부질없는 사랑은 결국 아도니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슬픔에 젖은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에 생명을 넣어 아네모네 꽃을 피웠다. 여기서 아네모네는 그리스어의 아네모스 (Anemos / 바람)에 어원을 두고 있다.


바다의 아네모네, 말미잘

말미잘(산호충강 육방산호아강 해변 말미잘 목에 속하는 자포동물의 총칭)을 영어로는 바다의 아네모네(sea Anemone)라고 부른다. 말미잘이 무성한 곳을 찾으면 조류에 하늘거리는 촉수의 화려함이 마치 한 떨기 꽃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말미잘은 입과 항문이 하나인 자포동물의 일종이며 화려한 촉수는 지나가는 작은 물고기를 유혹하여 포식하는 도구로 사용 된다. 그런데 말미잘은 민감한 동물이다. 화려한 촉수를 뽐내다가도 위험을 느끼면 순식간에 촉수를 강장 속으로 거두어들여 화려함을 감추고 뭉텅한 원통형의 몸통만을 남긴다. 몸통만 남은 말미잘은 아무런 매력이 없다. 다시 말미잘의 화려함을 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강장 속에 숨어있던 촉수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며 말미잘은 새롭게 활짝 피어난다.

바다 속에서 화려한 촉수를 뽐내는 말미잘
위협을 느끼고 촉수를 숨긴 말미잘


말미잘의 촉수가 화려하고 매력적이라 해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혼쭐난다. 이들 촉수에는 독을 지닌 자포가 있어 침입자나 먹잇감이 접근하면 총을 쏘듯 발사하기 때문이다. 자포가 지니는 독성은 작은 물고기를 즉사시킬 정도인데 사람도 피부에 직접 닿았을 때는 피부발진이 생기며 심한 경우 호흡곤란 등으로 상당기간 고통을 당한다. 말미잘의 화려함에 유혹되어 잘못 건드렸다가 고생하다 보면 아네모네의 꽃말 ‘사랑의 괴로움’을 실감하게 된다.


말미잘과의 공생으로 널리 알려진 흰동가리
말미잘의 자포에 한번 당해본 바다동물들은 말미잘 근처에 오면 몸을 사린다. 그런데 괴팍스러운 말미잘에게도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있다. 손가락 크기만한 작고 연약한 물고기 흰동가리(Yellow tailed anemonefish / 경골어류 농어목 자리돔과의 바닷물고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흰동가리는 말미잘 촉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뿐 아니라 이곳을 포식자의 공격을 막아내는 보금자리로 삼는다. 흰동가리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면 2003년 개봉한 앤드류 스탠튼 감독의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떠올리면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니모가 바로 흰동가리를 모델로 했다. 그럼 말미잘과 흰동가리의 공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포식자들 입장에서 볼 때 흰동가리는 만만한 먹잇감이다. 화려한 몸짓으로 헤엄치는 흰동가리의 유혹을 따라 붙었다가는 기다리고 있는 말미잘에게 당하고 만다. 보금자리를 제공받는 흰동가리는 말미잘을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먹을거리를 유혹해오는 셈이다. 또한 촉수 사이에 떨어져 말미잘을 성가시게 하는 찌꺼기는 흰동가리에게는 훌륭한 먹을거리가 된다.

말미잘의 촉수 사이를 노니는 흰동가리들


흰동가리가 어떻게 말미잘 독에 면역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여러 학설을 내 놓지만 정립된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면역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말미잘의 독성 물질을 몸에 묻히고 다녀 말미잘이 자신의 몸으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있다. 혹자는 한 번 공격 받은 흰동가리에게 후천적으로 면역이 생긴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말미잘의 색과 크기에 따라 함께 사는 흰동가리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다. 좀 연한 색을 띤 말미잘에는 화려하지 않은 무늬를 가진 흰동가리가 살고 화려한 촉수를 가진 말미잘에는 그와 어울리는 강한 무늬와 색을 지닌 흰동가리들이 살고 있다. 또한 말미잘의 크기에 비례하여 함께 사는 흰동가리의 크기가 다른 것을 보면, 이들의 공생에는 나름 어울리는 궁합이 있어 보인다. 대개의 경우 하나의 말미잘 개체에 3~4마리로 구성된 한 가족의 흰동가리가 살고 있다.

물속에서 조류에 따라 하늘거리는 말미잘의 촉수와 그 사이를 오가는 화려한 색의 흰동가리는 수중촬영을 목적으로 바다를 찾는 사람에게 좋은 소재가 된다. 그런데 촬영을 위해 이들의 보금자리로 다가가면 흰동가리 가족에게 비상이 걸린다. 새끼 흰동가리가 재빠르게 촉수 사이로 숨어들면 어미 흰동가리는 촉수 밖으로 튀어나와 맹렬한 기세로 침입자를 경계한다. 그 위세가 대단하여 손가락 크기만한 작은 물고기지만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다. 말미잘과 흰동가리의 공생은 수심이 얕은 열대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제주도 해역에서도 관찰 된다. 


다른 생물들도 말미잘과 공생한다
자기게(좌), 말미잘새우(우)도 말미잘과 공생하는 생물


자기게와 말미잘새우 또한 말미잘과 공생을 하지만 흰동가리의 화려함에 가려져 쉽게 관찰되지는 않는다. 흰동가리가 말미잘 촉수 사이를 화려한 몸짓으로 오가는데 비해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촉수 속에 숨어 지낸다. 게다가 크기도 3cm 정도로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말미잘 옆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촉수 사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자기게와 새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인다. 자기게는 껍질이 도자기처럼 매끈하여 자기게(磁器/ Porcelain crab)라고 이름 지어졌다.

말미잘은 이동을 위해 집게와 공생하기도 한다. 한자리에 붙어 살아야하는 운명을 극복하고자 말미잘은 집게의 껍데기 위에 자리를 틀고 집게가 움직이는 대로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집게 입장에선 말미잘을 업고 다니는 게 다소 부담스러워도 손해 볼 것은 없다. 포식자들이 싫어하는 말미잘과 함께 다니다 보니 호가호위의 위세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섬유세닐말미잘의 군락지, 칠포 어초 포인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섬유세닐말미잘
위협을 느꼈는지 촉수를 숨기고 있다.


경북 포항시 칠포해수욕장 인근에 인공어초가 투하된 곳이 있다. 스쿠버 다이버들은 이곳을 ‘칠포 어초 포인트’라 부른다. 여기에는 여름철이면 섬유세닐말미잘이 집단군락을 이룬다. 수심이 30m 가 넘어 쉽게 찾을 수 없어서인지 말미잘 군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보트에서 입수 후 어초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하늘을 향해 뻗은 말미잘들이 촉수를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반가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물살을 심하게 일으켜선 안 된다. 위협을 느낀 말미잘들이 뭉텅한 강장 속으로 촉수를 거두어들여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끝이다. 다시 강장 밖으로 나오는 말미잘 촉수를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스쿠버 다이버는 깊은 수심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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